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질문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까?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까?



질문: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까?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까?

대답: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정확히 말씀하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를 부인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0: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를 언뜻 보면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면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10:33). 이것은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함으로서 본인이 하나님 되심을 정말로 뜻하셨음을 지적합니다. 요한복음 8:58은 또 다른 예를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그러자 유대인들은 모독감에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말입니다 (레위기 24:15).

요한은 예수의 신위에 대한 개념을 반복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14). 이 구절들은 예수님은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암시합니다. 사도행전 20:28 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라.” 누구의 피로 교회를 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행전 20:28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피로 샀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 외쳤습니다 (요한복음 20:28). 예수께서도 도마의 고백을 정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디도서 2:13은 우리의 하나님 구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라 합니다 (베드로후서 1:1 또한 그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8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하나님이여” 라고 부르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한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만을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10).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도 여러 차례 경배를 받으십니다 (마태복음 2:11, 14:33, 28:9,17; 요한복음 9:38). 예수님은 자신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사람들에게 자신을 향해 경배하지 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그 천사처럼 말이죠.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다른 많은 구절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셔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만약 그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은 온 세상의 죄를 대신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2).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무한한 하나님께 대항한 우리의 죄값을 대신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이 그런 영원한 대가를 담당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21).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의 죄를 지고, 죽고, 죄와 죽음을 이긴 부활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질문: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대답: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라는 질문과는 달리 소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 했는지를 질문합니다. 일반적으로 약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을 몸소 걸었던 실제 사람으로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정체성을 논할 때 많은 논쟁들이 시작 됩니다. 대부분의 주요 종교가 예수는 선지자, 선한 교사, 혹은 거룩한 사람이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는 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서술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훌륭한 도덕 교사로 받아 들일 수는 있으나 그가 하나님이다라는 주장은 거부한다.’ 나는 이런 어리석은 자들을 저지하고 싶다. 이렇게 만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가 단지 한 인간으로서 예수가 언급했던 말들을 했다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훌륭한 도덕 교사가 될 수 없다. 헛소리를 헤대는 미치광이거나 지옥의 악마로 불리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니면 미치광이인지를 말이다. 그를 바보라고 욕하며 입을 다물게 하던지, 그에게 침을 뱉거나 악마로 취급하고 죽일 수도 있고 그의 발 아래 무릎 꿇고 그를 주님 그리고 하나님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제발 그를 말도 안 되는 대단한 교사로서는 포장하지 말자. 그는 그런 선택을 우리에게 남기지도 않았고, 의도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첫째, 요한복음 10:30의 예수님의 말씀 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언뜻 보면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이 무언가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10:33). 유대인들은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이라 주장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해석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30). 이렇게 말씀 하심으로 본인이 하나님되심을 진실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58은 또다른 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이 말을 듣고는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59). 예수님이 말씀 하신 “내가 있느니라 (I am)” 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으로(출애굽기 3:14) 예수님은 이를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이 말로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유대인들이 돌을 던지려 했겠습니까?

요한복음 1:1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임을 명백히 밝힙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 부르짖었습니다 (요한복음 20:28). 예수님도 이런 도마의 고백을 교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디도서 2:13),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후서 1:1)라 불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구약성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C.S. 루이스도 말했듯이 우리는 예수를 훌륭한 교사로 선택하여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뚜렷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지자나 좋은 교사나 거룩한 자로도 불릴 수 없습니다. 예수의 말을 해석하려는 현대 학자들은 과거의 실제 존재했던 예수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예수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감히 장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보다 2000년이나 후에 태어난 현대 학자가 예수님과 같이 살았고, 섬겼고,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보다 어떻게 더 나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4:26)?

그럼 예수님이 누구인지가 왜 이렇게 중요한 걸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이건 그렇지 않건 그것이 무슨 상관일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실 수 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만약 그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은 온 세상의 죄를 대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일서 2:2).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영원한 값을 치를 수 있습니다 (로마서 5:8; 고린도후서 5:21). 예수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 위해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 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되심은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적인가?



질문: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적인가?

대답: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 직접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의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만이 소유한 권한을 예수님께서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 처럼 말입니다 (사도행전 5:31; 골로새서 3:13; 시편 130:4; 예레미야 31:34). 또한 예수님은 그와 연관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디모데후서 4:1) 자라고 말 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요한복음 20:28). 바울은 예수님을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디도서 2:13) 라 했고,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셨다고 강조 했습니다 (빌립보서 2:5-8).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히브리서 1:8). 요한은 기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 예로 많은 성경구절들이 있지만 (요한계시록 1:17; 2:8; 22:13; 고린도전서 10:4; 베드로전서 2:6-8; 시편 18:2; 95:1; 베드로전서 5:4; 히브리서 13:20) 사실 이들 중 단 한 구절 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또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예전 명칭) 에게만 쓰여졌던 칭호가 주어집니다. 구약의 “구원자” (시편 130:7; 호세아 13:14) 는 신약의 예수님께도 쓰입니다 (디도서 2:13; 요한계시록 5:9). 또 예수님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마태복음 1장에 있는대로 불립니다. 스가랴 12:10 에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런데 이 말씀이 신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도 인용됩니다 (요한복음 19:37; 요한계시록 1:7). 여호와가 찔림을 당해 사람들이 바라볼 것이라 했고, 예수님이 찔림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졌다면, 예수님은 여호와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사야 45:22-23을 빌립보서의 2:10-11에 인용하여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또 기도문에 예수님의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과 같이 사용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1:3; 에베소서 1:2).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 기도는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단수형)” (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4) 으로 세례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이 여호와의 이름과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는 죽은 자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21; 11:38-44), 죄를 용서하시고 (사도행전 5:31; 13:38),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탱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2; 골로새서 1:16-17). 이는 여호와가 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 (이사야 44:24)을 생각할 때 훨씬 확실해집니다. 게다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유한 자질을 지닙니다. 영원성 (요한복음 8:58), 무소부재하심 (마태복음 18:20, 28:20), 전지하심 (마태복음 16:21), 전능하심 (요한복음 11:38-44)을 지니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입증해 보이는 것과 사람들이 그저 믿게 하려고 속이는 것은 완전히 틀립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신성한 기적들로 그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그의 몇 가지 기적들의 예 로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요한복음 2:7), 물 위를 걷고 (마태복음 14:25), 보이는 물체들을 배가시키고 (요한복음 6:11), 눈먼 자와(요한복음 9:7), 절뚝거리는 자와 (마가복음 2:3), 아픈 자를 치유하시고 (마태복음 9:35; 마가복음 1:40-42), 또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1:43-44; 누가복음 7:11-15; 마가복음 5:35). 게다가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화의 신들이 살고 죽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부활을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지도 않습니다. 또 특별히 문서로 기록해 입증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12가지의 역사적 사실은 비기독교인 비판학자들도 인정할 것이라 합니다.

1.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죽었다.
2. 그는 묻혔다.
3. 그의 죽음은 제자들을 절망시켰고, 모든 소망을 잃게 했다.
4. 예수의 무덤은 몇 일 뒤에 빈 채로 발견되었다.
5.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제모습을 경험했음을 믿었다.
6. 이 경험 후에 제자들은 의심 많은 자들에서 담대한 증인으로 변모하였다.
7. 부활의 소식은 초기 교회 설교의 중심이었다.
8. 부활의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선포되었다.
9. 이 말씀의 결과로 교회는 새로 태어났고 자라갔다.
10. 부활절 즉 일요일이 안식일인 토요일을 대신하여 예배 드리는 날로 지정되었다.
11. 회심주의자 야고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12. 기독교도의 대적이었던 바울은 특별한 경험, 즉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삶이 완전히 변화했다.

누군가가 이 목록 사항에 이의를 제하더라도, 부활을 증거하고 복음을 세우는데는 몇 가지 항목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의 죽음, 장사, 부활 그리고 다시 나타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1-5). 이 항목들을 설명하는 몇 개의 이론들이 있더라도, 오직 부활만이 이 모든 사실을 입증합니다. 여러 비판설도 제자들이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한 사실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거짓말이나 환상도 이 부활이 사람들을 변화시킨 것 만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과연 부활에 대한 주장으로 누가 어떤 이익을 보았겠습니까? 당시 기독교도는 환영 받지 못했고 돈을 벌어다 주는 종교도 아니었습니다. 둘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누가 순교하겠습니까? 제자들이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그 잔인한 죽음을 기꺼이 맞이 했다는 것은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실로 여기는 것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부를지언정 진실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들을 위해서는 죽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이 여호와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하나님 이셨습니다 (단지 어떤 하나의 신이 아닌 진실로 유일하신 하나님). 예수를 따르는 자들 (우상숭배를 혐오하는 유대인들) 은 예수를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기적들을 통해 특히 전 세계를 뒤흔든 부활을 통해 이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다른 어떤 가설로도 이 부활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적 신성 이십니다.

예수님의 3일일간 어디에 계셨을까?



질문: 예수님의 3일일간 어디에 계셨을까?

대답:
베드로전서 3:18-19에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18절의 “영으로는”는 “육체로는”과 동일한 어문구조인 것을 볼 때, “영”과 “육체”를 동일한 차원 에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육체와 영은 그리스도의 육체와 영입니다. “영으로 다시 사셨다”는 구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실 때. 그의 인간의 영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분리되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46). 여기서 육체와 영은 마태복음 27:41과 로마서 1:3-4절에 있는 인간차원에서의 육체와 영의 대립으로 봐야지 그리스도의 몸과 성령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죄 대속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새롭게 한 주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18-22는 그리스도의 고난 (18절)이 그의 영광 (22절)임을 보여줍니다. 오직 베드로만 고난과 영광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말합니다. 19절의 “전파하시다” 는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복음을 전파하다 할 때 동사와 틀립니다. 문자적으로는 메시지를 전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실 때 육체도 죽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영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영은 다시 살아 하나님 아버지께로 속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예수께서는 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특별한 선포를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베드로는 사람들을 “혼 (souls)”으로 명하고 “영 (spirits)” 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 “영”은 대체로 사람이 아닌 천사나 악령들을 가리키는 데 쓰였습니다. 그리고 22절에서도 이런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지옥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2:31은 “헤다스”에 가셨다고 나와 있으나, 헤다스는 지옥이 아닙니다. 헤다스는 죽은 자들의 영역 즉 죽은 자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머무는 일시적인 장소를 가리킵니다. NASB나 NIV번역판의 요한계시록 20:11-15을 보면 이 두 영역의 차이점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지옥은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 마지막 장소이자 영원한 곳입니다만 헤다스는 일시적 장소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영을 아버지께 맡기시고 죽으셨고,죽음과 부활 사이의 한 시점에서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영적 존재 (아마 타락한 천사; 유다서 6절을 참조) 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 영적 존재는 노아의 홍수 시점 이전과 어느 정도 관련됩니다. 20절에 좀 더 분명히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예수님이 전달한 내용을 말하지 않지만, 구원에 대한 소식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천사들은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16). 그렇다면 사단과 사단이 부리는 영들에 대한 승리에 대한 내용이었을 겁니다 (베드로전서 3:22; 골로새서 2:15). 또한 에베소서 4:8-10 은 그리스도가 낙원에 가셨고 (누가복음 16:20; 23:43), 그의 죽음 전에 믿었던 자들을 데리고 천국에 가셨음을 알립니다. 이 구절이 일어난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바는 없지만,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이를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라는 구절이 뜻하는 바로 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 전체적으로 예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 삼일 동안 무엇을 하셨는지 정확히 말하지 않습니다만, 타락한 천사들과 믿지 않았던 자들에게 예수님의 승리를 전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두 번째 구원의 기회를 주시지는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듯이 우리의 죽음 후에는 심판이지 (히브리서 9:27), 두 번째 구원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예수께서 하신 일에 대해 실제 정확한 답은 없습니다. 아마 이 난제는 우리의 영광을 볼 때에나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정말로 존재했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있는가?



질문: 예수는 정말로 존재했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있는가?

대답: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사실 성경을 벗어난 주제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예수님 실존에 대한 증거로서 부족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 성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만 수 백 구절 됩니다. 복음서가 예수의 죽음 후 2세기 경에 쓰여졌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주장에 대해 사실 반대가 많습니다만, 성경이 2세기 (AD 100년부터 200년 사이) 에 쓰여진 것으로 보더라도, 사건 발생 후 200년 안에 쓰여진 고대 자료들은 매우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학자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은 바울 서신(최소한 그 중 몇 개라도)이 1세기 중반 즉 예수 죽음 후 40년 안에 바울이 쓴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를 고대 문서 자료로 볼 때,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1세기 초반에 이스라엘에 존재했음을 증거하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또 알아야 할 중요 사항은 서기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역을 침략, 파괴하고 거주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곳의 많은 도시들이 실제로 모두 불에 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존재를 증거할 만한 자료들의 파괴되고,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의 살해당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생존했던 예수를 증거할만한 증거들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단절시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비교적 눈에 뜨이지 않는, 로마제국의 한 조그만 지역에 한정되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세속적, 역사적 자료들로부터 발견되는 예수님과 관련된 정보들의 양은 놀랄 만한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역사적 증거들을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1세기 로마 고대 역사가 중에 한 명인 타시투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본디오 빌라데에게 핍박 받았던 사람들을 미신에 사로잡힌 “크리스찬” (크라이스트에서 파생) 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하드리안 제국의 비서인 수토니우스는 1세기에 생존했던 크레스토스 (혹은 크리스트)라는 사람을 언급합니다 (Annals 15.44).

유대 역사가 중 가장 유명한 플레비우스 조세푸스는, 그의 저서에서 야고보를 “그리스도 예수의 형제”라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예수라는 한 지혜로운 자가 있다. 그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 위법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는 놀랄만한 공적을 세웠다 …그는 다름아닌 그리스도였다…그는 삼일 째 부활해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예언가들이 예언한 대로 말이다. 게다가 수 천개의 다른 놀랄만한 그리스도에 관련한 일들로 말이다.” 또 다른 번역서를 보면 “그 당시 예수라 불리는 지혜로운 자가 있었다. 그의 선행은 그를 덕이 높은 자로 손색없게 했다.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에 처했으나, 그의 제자들은 제자도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 사형 삼일 후에 그들 앞에 나타나신 후 그 분이 살아나셨음을 알렸다. 이런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아마 선지자들이 서술했던 경이로움으로 여긴 메시아였을 것이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역사가 탈루스를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후에 있었던 어두움을 논했습니다 (Extant Writings, 18).

Pliny the Younger는 그의 편지 10:96에서 초기 기독인들의 예배 관례상 예수를 하나님으로 찬양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당시 있었던 애찬식과 성찬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빌론의 탈무드 (산헤드린 43a)는 예수의 십자가형이 유월절 전날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스도가 마법을 부렸던 자로 고소되었다는 것, 그리고 유대인들이 배교하도록 고무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모사타의 루시안은 2세기경의 그리스 작가로서 예수님이 기독인들의 경배를 받았고, 그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고, 또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기록합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자들간의 형제애, 거듭납의 중요성, 또 다른 신들을 부인하는 것의 중요성을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자신들을 불멸하는 존재로 여기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자발적인 자기 헌신, 그리고 물질적 풍요를 포기한 자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라 바 세라피온은 예수를 현명하고 덕 있는 자로 여겨졌다고 재확인합니다. 즉 많은 자들이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여겼고,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그대로 살았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밖에, 영지주의적인 (The Gospel of Truth, The Apocryphon of John, The Gospel of Thomas, The Treatise on Resurrection, etc.) 글들을 통해서도 예수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초기에 쓰여진 비기독교 글들을 통해서도 복음을 재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로 불려졌고(조세푸스 문서 참조), 마술을 행했고, 이스라엘을 새로운 가르침으로 이끌었고, 이스라엘을 위해 유다에서 (타시투스 문서 참조) 유월절 날 죽임을 당했다 (바빌론 탈무드 참조).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 되시며 본래의 위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셨다 (엘리자 참조). 또한 이 사실은 그의 제자들이 그를 신으로 숭배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Pliny the Younger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세속적인 자료나 성경 역사적 자료 양쪽 방면에서 모두 풍성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아마 예수의 실존에 대한 가장 큰 증거는 1세기에 실재로 존재했던 수 천명의 기독교인들과 열두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교했다는 사실일 겁니다. 사람은 진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릴 수는 있겠지만, 거짓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무엇일까?



질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무엇일까?

대답:
예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혼해서 아들을 두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와 연합하여 아들을 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의 형체로 나타났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 14). 예수는 성령에 의해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누가복음 1:35에서,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성경이 쓰여진 당시에는 “사람의 아들 (인자)”은 인간을 뜻했습니다. 즉, 인자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가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재판 받으실 때, 대제사장이 말하기를,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태복음 26:6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태복음 26:64).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고발합니다. (마태복음 26:65-66). 후에,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9:7). 왜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신성모독으로 여겨지고 사형 선고를 받을 만큼의 일로 여겨졌습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속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인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 즉 하나님과 같다고 하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레위기 24:15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예수의 죽음을 요구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은 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또 다른 예를 요한복음 17:12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멸망의 자식”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71은 유다는 시몬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요한복음 17:12절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단어 “멸망”은 “파괴, 파멸,”을 뜻합니다. 유다는 파괴, 파멸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의 삶의 정체가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파멸이 가시화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1, 14).

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이 중요한 문제인가?



질문: 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이 중요한 문제인가?

대답: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사야 7:14; 마태복음 1:23; 누가복음 1:27, 34). 첫째, 성경이 이 축복된 사건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봅시다.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당혹스러워 할 때, 가브리엘 천사는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엎으시리니” (누가복음 1:35). 천사는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라고 (마태복음 1:20)” 설명해주면서, 마리아와 결혼해도 된다고 격려합니다. 마태는 처녀가 (마태복음 1:18). 갈라디아서 4:4도 처녀를 통한 탄생을 가르칩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예수의 탄생은 마리아의 몸을 통한 성령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물질 (성령)과 물질(마리아의 자궁) 모두가 관련된 사건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이 임신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면, 그녀는 그저 도구로 쓰인 것 뿐 입니다. 이렇게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성육신의 기적을 이루십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예수가 혈연 관계가 아니다라는 사실은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성경은 예수가 우리와 같이 육체를 가진 온전한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육체는 마리아를 통해 주어진 동시에 예수는 영원한 그리고 죄 없는 온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디모데전서 3:16; 그리고 히브리서 2:14-17)

예수님은 죄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즉, 그는 죄의 속성이 없으셨습니다 (히브리서 7:26). 죄는 아버지를 통해 세대에서 세대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듯 싶습니다.(로마서 5:12, 17, 19). 그러나, 동정녀를 통한 예수의 탄생은 이렇게 이어지는 죄를 막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죄 없는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죽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는 일요일까지 어떻게 무덤에서 삼 일을 보내실 수 있었을까요?



질문: 예수님은 금요일에 죽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는 일요일까지 어떻게 무덤에서 삼 일을 보내실 수 있었을까요?

대답:
성경은 예수님이 주중의 어느 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습니다만, 일반적으로 금요일이나 수요일로 봅니다. 그러나 금요일과 수요일의 중간인 목요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2:40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금요일을 주장하는 측은 무덤에서 3일간의 시간을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1세기의 유대인 관념에는, 하루의 일부분도 전체 하루로 간주되었습니다. 금요일의 일부 시간만을 하루로 가정한다 하더라도, 토요일 전체, 일요일 일부 시간을 3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42을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 전날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식일이 토요일이라면 금요일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날이 됩니다. 또 마태복음 16:21과 누가복음 9:22에는 예수께서 제 삼일이 되는 때에 부활하셨다고 하신 것을 보면 꼭 삼일 밤낮을 빈틈없이 채우는 시간을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장일치가 되는 해석은 아닙니다 . 마가복음 8:31에는 예수께서 삼일 “후”에 부활할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목요일을 주장하는 측은 그리스도가 장사된 날로부터 주일 아침까지 일어난 일들이 금요일 밤부터 주일 아침까지 일어나기에는 너무나 많다고 봅니다 (20가지). 게다가 하루 전체로 온전히 볼 수 있는 날이 금요일과 주일 사이의 토요일인데, 마침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나 이틀 정도의 시간이 더 있어야 이런 문제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요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월요일 밤 이후로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만났을 때가 목요일 아침이라고 한다면, “삼일 간 못 만났네.’라고 할 것입니다. 실제로는 60시간 (2.5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목요일을 주장하는 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을 주장하는 측은 그 주간의 안식일을 두 차례로 간주합니다. 첫 안식일 후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 날 밤, 마가복음 15:42; 누가복음 23:52-54) 여자들은 향유를 구입했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후에 구입했다는 기록을 보세요 (마가복음 16:1). 그리고, 수요일 대변측은 이 안식일을 유월절로 봅니다 (레위기 16:29-31; 23:24-32; 39를 보면, 큰 안식일이 꼭 주간의 제 7일째라는 말이 없습니다). 두 번째 안식일은 평범한 주일의 토요일입니다. 누가복음 23:56을 잘 보세요. 첫 안식일이 지나 향유를 산 여인은 집에 돌아와 “안식일에 쉬었다” (누가복음 23:56)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문장을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안식일이 두 번 있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안식일 “후”에 향유를 사고, 안식일 “전”에 향유를 준비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두 차례의 안식일을 가정하면, 그리스도가 목요일에 죽으시고, 큰 안식일 (유월절)은 목요일 해질 무렵 시작되어 금요일 해질 무렵 즉, 안식일이나 토요일이 시작되는 무렵에 끝나는 것으로 봅니다. 첫 안식일 (유월절) 이후에 향유를 구입했다는 것은 토요일에 샀다는 것이 되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수요일을 주장하는 관점에서는 여자와 향유의 이야기를 부정하지 않고 마태복음 12:40을 그대로 이해하게 되려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수요일이 되어야 합니다. 큰 안식일(유월절)은 목요일에, 그 후 여자는 금요일에 향유를 구입했고, 같은 날 집에 돌아와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즉 주간 안식일에 휴식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이른 아침 향유를 무덤에 가지고 갔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수요일 해질 무렵, 유대달력으로 목요일이 시작되는 날 장사되었습니다. 그럼, 유대 달력으로 목요일 밤낮을 하루, 금요일 밤낮을 하루, 토요일 밤낮을 하루로 계산해 삼 일이 됩니다. 정확히 어느 시간에 부활하셨는지 모르지만, 주일 해 뜨기 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말하길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갔다”고 전합니다). 그러므로, 토요일 해진 후 이른 시각에 부활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토요일 밤 해질 무렵 유대인들은 주일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봅니다.

그런데, 수요일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엠마오를 향해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 걷고 있었고 (누가복음 24:13), 그들과 같이 걷고 있던 예수님을 알아 차리지 못한 그들은 예수님에게 예수의 죽음 (24:21)에 대해 전하면서, “오늘은 이 일이 일어난지 3일 되었다”고 말합니다 (24:22). 그런데,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4일이 걸립니다. 수요일이 옹호되려면, 수요일 밤을 유대인들의 목요일로 해석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크게 보면, 예수께서 무슨 요일에 십자가형을 당하셨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날에 분명히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육체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또 그만큼 중요한 것은 그가 죽으신 이유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죄인이 받기에 마땅한 형벌을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과 3:36 말하길 그 분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영생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수요일, 목요일, 혹은 금요일에 달리셨던지 간에 동일한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사실인가?



질문: 예수의 부활은 사실인가?

대답: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태복음 28:1-20; 마가복음 16:1-20; 누가복음 24:1-53; 요한복음 20:1-21:2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1-11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얻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의 급격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숨는 존재에서 담대하게 세상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변모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나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의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는 사도 바울의 삶입니다. 무엇이 그를 교회를 핍박하는 자에서 교회를 위한 사도가 되도록 했습니까? 다마섹에 가는 길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행전 9:1-6). 세 번째 확실한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의 시체는 어디 있어야 합니까?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장사된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무덤으로 다시 왔을 때, 예수의 시체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대로 죽음에서 일어나셨다고 전했습니다 (마태복음 28:5-7). 또 다른 부활의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고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28:5,9,16-17; 마가복음 16:9; 누가복음 24:13-35; 요한복음 20:19, 24, 26-29, 21:1-14; 사도행전 1:6-8; 고린도전서 15:5-7).

그 중 핵심적인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에 있습니다. 이 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설명합니다.

1.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으셨다면, 신자들도 부활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12-15).

2.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으셨다면, 그의 죽음은 죄를 대속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15:16-19). 예수의 부활은 그의 죽음이 죄를 위한 대속죄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단순히 죽은 체로 머문다면, 이는 그의 죽음이 죄를 위한 대속죄로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신자들의 죄도 용서 받지 못하고, 그들이 죽은 후에도 죽은 자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15:16-19)- 즉 영생과 같은 것은 없게 된다 (요한복음 3:16).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습니다. 즉 그는 우리 부활할 자들의 첫 열매 되십니다.

3. 모든 그를 믿는 자는 그와 같이 영생으로 부활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0-23). 고린도전서 15장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힘 주심을 증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5:24-34). (4)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받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35-49) (5)그리스도의 부활로 모든 믿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이길 것이다 (고린도전서 15:50-58).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정말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리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전 15:58).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연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것이 또한 4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나아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의 결정적인 기독교 교리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정말 지옥에 계셨을까요?



질문: 예수님은 정말 지옥에 계셨을까요?

대답:
과연 예수님의 영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지옥에 있었을까요? 이 물음을 두고 많은 논란들이 있습니다만 사도신경의 원문을 보면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구문이 나옵니다. 또한 몇 성경구절도, 해석이 다를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합니다. 이 문제를 논하려면, 먼저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의 영역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Sheol”로 표현합니다. 단순히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 혹은 “떠나간 영/혼이 거하는 곳”을 뜻합니다. 신약성경은 지옥을 그리스어 “Hades”로 표현하며, 동일하게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을 뜻합니다. 또 Sheol /Hades가 쓰인 다른 구절들은 영들이 마지막 부활과 심판을 기다리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는 이 두 곳을 구별하여, 지옥 (불의 연못)은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는 영원한 끝으로, 헤다스는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옥에 가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지옥은 미래에, 오직 백보좌 심판 후에 일어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Sheol/Hades는 두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마태복음 11;23; 16:18; 누가복음 10:15; 16:23; 사도행전 2:27-31), 즉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처소로 구분됩니다. 구원받은 자의 처소는 낙원이나 아브라함의 품으로 불립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처소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처소 사이의 골은 너무 깊습니다 (누가복음 16:26).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사로잡힌 자를 자신과 함께 데리고 올라가셨다고 했는데 (에베소서 4:8-10), 그렇다면 구원받지 못한 자는 Sheol/ Hades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불신의 상태로 죽은 모든 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Sheol/Hades에 가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8-10과 베드로전서 3:18-20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시편 16:10-11을 보면 좀 혼란스럽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여기서 음부는 옳은 번역이 아닙니다. “무덤”이나 “Sheol”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옆의 십자가의 강도에게 말씀하시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거하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몸은 무덤에, 영혼은 Sheol/Hades의 낙원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후, 그 낙원에 거하는 모든 의로운 영들을 데리고 천국으로 가십니다. 불행히도 성경의 많은 부분이 Sheol, Hades, Hell을 정확하고 일관적으로 번역하지 못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옥이나 헤다스의 고통의 부분에 가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추가로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는데, 성경과는 무관한 의견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의 죽음과 고난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흘리신 보혈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1:7-9).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이는 게세마세 동산에서의 십자가에서 부어질 죄의 쓴 잔을 마셔야만 하는 고통을 이해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그에게 부어진 우리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버리셨을 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46)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온전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영혼은 헤다스의 낙원으로 갔습니다. 지옥에 가신 것이 아닙닌다. 그의 고난은 죽으신 그 시점에 이미 끝났습니다. 죄 값은 지불되었습니다. 자신의 몸의 부활과 승천시 다시 주어질 영광을 기다리셨습니다. 지옥에 가셨다구요? 아닙니다. Sheol/Hedas에 가셨다구요?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