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관련된 질문
교회는 무엇인가?
질문: 교회는 무엇인가?
대답: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그저 하나의 건물로 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에서 유래되는데, 회중의 “모임” 혹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뜻합니다. 즉 교회는 근본적으로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실 어느 교회를 출석하느냐는 질문에 침례교, 감리교 혹은 다른 교파를 얘기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대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하면 교파나 건축물로 정의하지만 로마서 16장 5절,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를 보면, 바울은 어떤 교회건축물의 이름이 아니라 한 무리의 신자들을 지적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1:22-23 말하길,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리스도의 몸은 성령 강림절 때 부흥된 신자들로부터 예수님 재림시 사로잡힐 사람들까지 그 사이의 모든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두 부분으로 구성할 수 있습니다:
1. 우주적인 관점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12:13을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합니다. 즉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는 어떤 특정한 교회 건물이나 교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전우주의 모든 교회를 망라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을 통한 구원을 받은 모든 자들을 뜻합니다.
2. 지역 교회는 갈라디아서 1:1-2, “사도 된 바울은…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 지방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음을 봅니다. 즉 오늘날의 침례 교회, 루터 교회, 카톨릭 교회 등은 교회라 불릴 수 없습니다. 우주적인 규모로 바라볼 때 이들은 하나의 지역교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교회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전 지구적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지역 교회 안에서 교제와 양육을 추구해야 합니다.
정리해보면, 교회는 건물이나 교파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둔 모든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3;16; 고린도전서 12:13). 지역교회들은 보편적 교회 일원들의 모임입니다. 지역교회는 보편적 교회의 일원들이 고린도전서 12장의 “몸”의 원칙: 격려, 가르침 그리고 주 예수 그리도의 은혜와 진리안에서 서로를 세우기를 온전히 적용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질문: 교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대답: 사도행전 2:42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교회의 목적은 (1) 성경 교리 가르침 (2) 성도들을 위한 교제 제공 (3) 성찬식 (4) 기도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의 교리를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믿음가운데 굳건히 서도록 합니다. 에베소서 4:14 말하길,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 또 교회는 교제의 장소입니다. 교제를 통하여 서로에게 헌신하며 서로를 귀히 여기고 (로마서 12;10), 서로를 교훈하며 (로마서 15:14), 서로를 친절과 자비로 대하며 (에베소서 4:32), 서로를 격려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1),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서로 사랑합니다 (요한일서 3:11).
교회는 성도들이 성찬식을 지키는 장소가 되야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를 위해 그의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3-26). “떡을 떼며” (사도행전 2;42)라는 말의 뜻은 함께 식사를 한다는 뜻으로 이는 또한 교회의 교제를 향상시키는 경우를 얘기한다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기도를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기도를 권면하고, 가르치고, 실제로 행합니다. 빌립보서 4:6-7기도를 격려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또 다른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나누는 데 충성하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방향을 가리키는 지역사회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베드로전서 3:15).
그 밖에 교회의 목적은 야고보서 1:27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교회는 필요가 있는 자들을 섬기는 일을 다룹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것뿐 아니라 실제적인 필요를 필요할 때 그리고 적절하게 채우는 것도 포함합니다 (음식, 옷, 거주). 교회는 또한 사람들이 죄를 극복하고 세상의 물들지 아니하고 정결하게 사는 방법들로 사람들을 가꿉니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성경적 가르침과 크리스찬 교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적은 무엇이라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12-27에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며 우리는 이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이며, 입이며, 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이 땅에 계셨으면 하실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질문: 세례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대답: 성경에 따르면 기독교의 세례는 한 신자의 내면에서 일어난 바를 외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 묻힘, 부활과 동일시되어 설명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큰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3-4).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잠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장사되는 것을, 그리고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례 받기 전에 요구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세례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신뢰해야 하고, (2) 세례가 뜻하는 중요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 예수를 구세주로 알고,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순종의 첫 단추임을 이해하고, 세례 받기를 소망한다면, 세례를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는 공표 즉 순종의 첫 발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는 중요합니다. 즉 그리스도에 둔 믿음을, 그를 따르겠다는 다짐을,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그리고 부활에 참여한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성도 목사나 설교자란? 성경은 사역하는 여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 여성도 목사나 설교자란? 성경은 사역하는 여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대답: 아마 여성 사역자 주제 만큼 오늘날 교회에서 더 많은 논쟁거리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 대 여성 이렇게 대립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들은 여자는 목사로 섬겨서는 안 된다고 믿고, 성경도 또한 여성의 사역에 대해 제한하고 있습니다. 반면 여성 설교자의 섬김과 여성들의 사역에 제한을 두지 않는 남성들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차별대우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해석의 문제로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하셨습니다(디모데전서 2:11-12).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각각 달리하셨습니다. 이는 남녀가 창조된 원리에 부합되는 것이고 죄가 세상에 들어 오게 된 연유때문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2:13-14).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여성들이 영적인 가르침으로 섬기는 데 있어서 남성 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에 제재를 가하십니다. 이는 여성이 목사로서의 섬김 즉 설교하고, 가르치고, 영적인 권위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여성 사역 제한을 반대하는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첫째, 바울이 여성의 가르침을 막는 이유는 1세기의 여성들은 교육받은 자가 특별히 적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1-14어디에서도 교육적 지위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만약 교육이 사역을 위한 자격조건이었다면 대다수 예수의 제자들은 자격미달입니다. 둘째, 바울이 단지 에베소의 여성들만 가르치는 사역에서 제외시켰다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쓰여진 글입니다). 에베소 도시는 그리스 로마가 섬겼던 신, 아르테미스의 성전으로 유명했습니다. 아르테미스에 대한 예배는 여성이 주도권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어디에서도 아르테미스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바울도 아르테미스 숭배문제를 가지고 디모데전서 2:11-12을 통해 제한시키지 않았습니다.
셋째, 바울이 단지 남편과 아내를 상대로 여성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것이지 일반적으로 남성 대 여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어는 남편과 아내만을 뜻 하지만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뜻합니다. 더군다나 같은 그리스어가 8절에서 10절에서도 쓰입니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결혼한 남편들에게만 얘기하는 것입니까 (8절)? 단정한 옷을 입으며 오직 선행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결혼한 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9절-10절). 물론 아닙니다. 8절부터 10절은 분명히 남성과 여성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4절에서도 대상이 갑자기 남편과 아내들로 전환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이의는 여성 목사나 설교자를 해석할 때 성경에서 리더쉽의 자리에 있었던 미리암, 드보라, 훌다, 프리실라, 뵈뵈를 예로 듭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데보라의 경우, 그녀는 13명의 사사중에 유일한 여성 사사였습니다. 훌다의 경우, 그녀는 성경에서 말 하는 13명의 선지자 중에 유일한 여성 선지자 였습니다. 미리암의 리더쉽은 그녀가 모세와 아론의 혈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왕조 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여성은 아달리아와 이세벨이나 그들은 거룩한 여성 리더쉽을 거의 보이지 못했습니다. 중요한건 구약에서 여자의 권위는 논 할 문제로 적절치 않았습니다. 디모데전서는 교회의 새로운 예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것은 이스라엘이나 구약체제가 아닌 교회의 권위를 포함합니다.
비슷한 논쟁으로는 신약에 나오는 프리실라와 아퀼라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8장에 그리스도의 충성된 사역자로 묘사됩니다. 프리실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서 그녀가 남편보다 사역을 훨씬 뛰어나게 감당한 한 것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프리실라가 디모데전서 2:11-14절에 대립되는 사역활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프리실라와 아퀼라는 아볼로를 그들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하나님의 말씀을 더 효과있게 전달함으로 그를 제자로 양육 했습니다 (사도행전 18:26).
로마서 16:1에서 뵈뵈를 “종”보다는 “여집사”로 여겼지만 그녀가 교회의 교사였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은 집사들이 아닌 장로들에게 주어진 자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3:1-13; 디도서 1:6-9). 장로/주교/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 “믿음이 좋은 자녀를 둔 남자” 그리고 “존경할 만한 남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1-13와 디도서 1:6-9에서는 남성 대명사가 특별히 장로/주교/집사들을 언급하는 데 쓰였습니다.
디모데전서 2:11-14의 구조는 아주 확실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13절은 “왜냐하면”의 접속사로 시작하여 바울이 11절과 12절에 언급한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왜 여성의 가르침은 금지되었고 남성에게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후에 여성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임을 당한 것은 여자였지 아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고, 이브를 아담의 “조력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창조 질서는 지구상의 모든 가정과 교회에 적용됩니다 (에베소서 5:22-33). 이브가 속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여성의 목회자 사역과 남성에게 영적 권위 사용의 부적합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여성은 쉽게 속기 때문에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자가 더 쉽게 속임을 당한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잘 속아 넘어가는) 가르치고 또 다른 여성(더 잘 속는다고 가정된) 들을 지도할 수 있습니까? 이는 본문이 뜻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브는 속임을 받았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고,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남자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여성은 대접, 동정, 긍휼, 가르침, 그리고 돕는 은사에 강합니다. 교회 내의 많은 사역이 여성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것을 빼놓고는 여성이 기도나 예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5). 성경 어디에서도 여성들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제한 두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갈라디아서 5:22-23),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하나님은 교회에서 오직 남자만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서 섬기도록 정하셨습니다. 이는 남자가 더 수준 높은 교사이거나 여성이 남자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교회를 이렇게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남성이 그들의 삶과 언어사용을 통해서 영적 리더쉽의 모범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여성은 조금 덜 권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여성은 다른 여성을 가르치라고 되어있습니다 (디도서 2:3-5). 성경은 또한 여성의 아이들 교육에 제재를 가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활동이 제한된 경우는 남자를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자연히 목사나 설교자로 활동하는 여성들을 포함합니다. 이는 여성이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성에게 더 유리하게 만드신 은사들에 전력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참석은 왜 중요한가?
질문: 교회 참석은 왜 중요한가?
대답: 성경은 우리가 다른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말씀을 배우기 위해 교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2:42; 히브리서 10:25). 교회는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곳이며 (요한일서 4:12), 격려하고 (히브리서 3:13), 권면하고 (히브리서 10:24), 섬기고 (갈라디아서 5:13), 교훈하고 (로마서 15:14), 존중하고 (로마서 12:10), 그리고 친절하고 긍휼히 대하는 곳입니다 (에베소서 4:3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자는 그리스도 몸의 한 일원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2:27). 교회의 몸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몸의 모든 부분들이 현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14-20). 이렇게 본다면 한 신자는 다른 신자의 도움과 격려 없이는 절대로 온전한 영적인 성숙에 이를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1-26).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 출석, 교회 활동의 참여 그리고 성도간 교제는 한 신자의 신앙 삶에서 일반적인 것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에게 매주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요구된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다른 신자들과 교제하고픈 갈망이 있어야하겠습니다.
성찬식은 왜 중요한가?
질문: 성찬식은 왜 중요한가?
대답: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성만찬 (최후의 만찬)을 연구하다 보면 그 의식에 함축된 의미의 깊이에 영혼이 울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날 밤 유월절을 기념하고 계시는 동안 예수님이 제자들과의 식사를 특별히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도 이 의식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 예배의 없어서는 안될 부분입니다. 이 의식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영광스런 재림을 바라보게 합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사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축제였습니다. 이 날은 이집트에 내려진 마지막 재앙인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죽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집 문설주에 뿌려진 어린 양의 피로 생명이 보호되었던 사건을 기념합니다. 그 재앙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인들은 그 양을 구워서 무교병과 함께 먹었습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기념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이는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중(유월절을 기념하며) 예수님께서는 떡을 축복하시고는 그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나의 몸이니”. 또 잔을 가지시고 사례하시고 그들이 마시도록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22:19-21) 예수님은 성찬식을 찬양으로 마치시고(마태복음 26:30)는 밤에 감람산으로 가시고 예언된 대로, 유다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십자가에 메달리셨습니다.
성찬식에 대한 기록은 마태복음 26:26-29; 마가복음 14:17-25, 누가복음 22:7-22; 요한복음 13:21-30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고린도전서 11:23-29에 마지막 성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서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11:27-29). 여기서 우리는 합당치 않은 참예가 어떤 것인지 묻게 됩니다. 이는 떡과 잔의 진정한 의미를 무시하거나 구세주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치루신 그 엄청난 대가를 잊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혹은, 성찬식을 단지 죽은 형식적인 예식이 되게 한다거나 고백하지 않은 죄를 지닌 체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훈을 염두하기 위해 바울의 교훈을 따라 각자 떡과 잔을 먹고 마시기 전에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바울은 또 복음서에서 발견되지 않은 말을 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11:26). 이 구절은 성찬식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행하라고 시간제한을 줍니다. 이 간단한 사실들을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가장 연약한 두 가지 요소인 자신의 몸과 피를 이용해 그의 죽음을 뜻하는 기념비로 만드셨는지 배웁니다. 잘 조각된 대리석의 기념비가 아닌 떡과 포도주로 만들어진 기념비였습니다.
예수님은 떡이 부서질 자신의 몸을 뜻한다 하셨는데, 뼈가 부서지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몸의 형상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셨습니다 (시편 22:12-17, 이사야 53:4-7). 그리고 예수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도 그가 곧 맞이할 혹독한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약에 있는 수많은 구세주에 대한 예언의 성취가 되셨습니다 (창세기 3:15; 시편 22; 이사야 53 등등). 예수께서 “나를 기념하여 하라” 하신 것은 미래에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의식임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어린 양의 죽음을 요구한 유월절 그리고 세상의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 양의 오심을 바라보라는 의미로서의 유월절의 필수불가결을 뜻합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 즉 유월절 어린양 (고린도전서 5:7)이 희생되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서 8:8-13). 그러므로 제사제도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25-28). 성만찬/성찬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기념하며, 그분의 희생에 대한 결과로서 우리가 받게되는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왜 조직화된 신앙을 믿어야 하는가?
질문: 왜 조직화된 신앙을 믿어야 하는가?
대답: 사전은 종교를 정의하길, “하나님에 대한 믿음, 혹은 숭배되는 신들에 대한 믿음, 대개 행위와 의식으로 표현됨, 모든 종류의 믿음, 예배 체계, 종종 윤리적 성격이 관여됨.” 이 정의에 따르면 성경은 조직화된 종교를 소개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조직화된 종교의 목적과 그것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아래에 조직화된 종교가 묘사된 일부 예들을 열거하였습니다.
창세기 11:1-9: 아마도 첫 조직화된 종교에 대한 예일 것입니다. 노아의 후속들은 탑을 높이 쌓으면 구원 받을 것이라는 믿음 체계를 가지고 탑 건축을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협동이 자신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개입하여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시고는, 그런 그들의 믿음을 깨셨습니다.
출애굽기 6장과 그 이하: 하나님은 아브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조직된 관계는 출애굽 초기에서부터 볼 수 있으며 그리고 그 후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칩니다. 십계명, 장막, 제사제도 등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조직된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져 나갔습니다. 신약성경을 더 연구하다 보면 이 종교는 결국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이끌었지만 (갈라디아서 3장; 로마서 7장), 많은 사람들은 이를 잘못 이해하였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보다 그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에 메이게 되었습니다.
사사기와 그 이하: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직화된 종교의 혼란으로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알 (사사기 6장; 열왕기상 18장); 다군 (사무엘상 5장); 몰렉 (열왕기상 23:10). 하나님은 이런 종교들을 통하여 그것들을 능가하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복음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그리스도가 살아계셨을 당시 조직화된 하나의 종교체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잘못된 가르침과 위선적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음을 계속해서 지적하셨습니다. 그런 종교체계에서 벗어나게 되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바울이 그 중에 하나였습니다.
바울 서신: 복음을 행위 구원과 혼합시키려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자들의 믿음을 자신들의 믿음으로 변경하도록 많은 압력을 넣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는 이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마지막 날에 조직된 믿음 체계는 모든 적그리스도적인 종교가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미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조직된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한 계획인 기독교인들의 조직을 말합니다. 그들을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은 교회는 조직되어져야 하고 상호보완 될 수 있는 길을 제공합니다. 조직은 보호, 생산성 그리고 전도로 이끕니다 (사도행전 2:41-47). 이런 경우에서는 이를 조직이라기 보다는 “조직화된 관계”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기독교 믿음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 이르기 위한 계획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8). 교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8-9). 리더쉽에 대해 논쟁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8). 편견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조직적인 모습을 갖추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규율과 의식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까?
질문: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까?
대답: 출애굽기 20장 11절의 6일 간의 창조와 7일 째 안식의 연계성 때문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이미 안식일을 만드셨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렇게 제 칠일에 하나님이 일을 쉬었다는 것(창세기 2:3)을 후일 안식일 규정에 대한 전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스라엘의 자손이 애굽을 벗어나는 시점 이전에는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즉,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안식일이 지켜진 예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안식일 규정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특별한 사인임을 분명히 합니다.“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연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출애굽기 31:16-17).
신명기 5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십계명을 다시 들려주는데 여기서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하고 (12절-14절), 안식일을 준수해야 할 이유를 줍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였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명기 5:15).
안식일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를 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음을 기억하라는 연유에서입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보면, 안식일에는 집에서 밖으로 나가면 안됩니다 (출애굽기 16:29). 또 불을 지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35:3). 또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지 못합니다 (신명기 5:14). 안식일 규정을 깨는 사람은 죽음에 처해졌습니다 (출애굽기 31:15; 민수기 15:32-35).
신약에 있는 구절들을 연구하다 보면 네 가지 중요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1)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나타나실 때마다 그 날이 언급됐는데, 모두 주중의 첫째 날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1, 9, 10; 마가복음 16:9; 누가복음 24:1, 13, 15: 요한복음 20:19, 26). 2) 사도행전부터 계시록까지 안식일은 딱 한번 언급되었는데, 이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대개 유대인 회당이 그 배경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18장). 바울의 경우를 보면,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고린도전서 9:20). 바울은 회당에 간 것은 유대인들과 교제하여 그들을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잃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 바울이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사도행전 18:6) 라고 말한 이후로는 안식일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4) 그 이후로는 안식일을 꼭 준수하라는 명령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예들만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2:16절에서 발견되는 3)번의 사항만 제외).
4)번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또한 일요일을 안식일로 보는 것도 비성경적입니다. 위에서 토론한 것처럼 바울이 이방인 사역을 시작한 이후로는 안식일이 딱 한 번 거론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로새서 2:16-17). 유대인의 안식일은 십자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셨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14).
이는 또 신약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서도 반복됩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로마서 14;5-6a).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갈라디아서 4:9-10).
그러나 어떤 주장은 말하길 서기 321년 콘스탄틴의 명령으로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초기교회는 예배를 위해 무슨 요일에 모였습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 안식일이 토요일이었다고 한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주의 첫 날이었다는 명확한 문장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0:7은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러 하여 모였더니”합니다. 고린도전서 16:2에서는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합니다. 바울이 이를 고린도후서 9:12에서 봉사의 직무로 고안한 것으로 볼 때, 이 연보는 주일 예배와 연계시켜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일요일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날이었고 1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여전히 토요일이지 일요일 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구약 율법의 한 부분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율법의 묶임에서 자유합니다 (갈라디아서 4:1-26; 로마서 6:14). 토요일이던지 일요일이던지 안식일 준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지 않습니다. 주중의 첫날, 일요일, 주님의 날 (계시록 1:10)은 새 창조물로서 부활하신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송축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안식일에 대한 의무 즉 단순한 휴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섬김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각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대해 결정하라고 합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로마서 14:5).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어 있지, 토요일이나 일요일만이 예배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