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과 관련된 질문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답: 여기서 우리가 언급하려는 것은 창조론 대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인 논쟁은 아닙니다. 창조론 대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인 입증을 보시려면, 창세기에 대한 해답들을 가지고 있는http://www.answersingenesis.org, 과 우주창조 연구 기관의 웹사이트http://www.icr.org.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여기서는 왜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의 찬반론이 아직까지 존재하는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로마서 1:25에,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합니다.
그런데 진화론을 믿는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들 입니다. 그 중 일부 과학자는 진화 과정에서 신이 개입했다고 믿습니다만, 신의 개입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신은 존재하지만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모든 것은 자연 법칙의 결과일 뿐이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진화론이 순전히 데이터만을 가지고 설명되므로 진화론이 더 적합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들은 진화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 중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진화론 지지 과학자들은 생명은 어떤 다른 높은 존재의 간섭이나 개입 없이 전적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자연과학으로 정의됩니다.
무신론이 사실이 되려면, 우주와 생명이 창조자 외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기 전에도 진화론과 같은 형식의 논리가 있었지만, 진화 과정에 대한 평이한 모델을 제시했던 것은 다윈이 처음이었습니다. 다윈은 한 때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했지만, 자신에게 일어났던 몇 비극적인 일들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즉 진화론은 무신론자에 의해 고안된 것입니다. 다윈은 하나님의 존재를 반증하려는 목적은 없었지만, 진화론의 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즉 진화론은 무신론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의 목적은 생명의 근원을 설명하는 데에 있지 않다고 하면서 신에 대한 존재를 거부합니다. 즉 무신론적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진화론이 존재하게 된 이유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 14:1; 53:1) 했고, 또한 창조의 하나님을 부인할 만한 핑계가 없다고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롬 1:20).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까지 포함해서, 진화론 과학자들이 과학적인 데이터를 객관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믿으려는 것일까요? 성경에 따르면 그들도 모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음은 지적 부족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진화론 과학자들은 지적으로 아주 굉장히 명석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어리석다는 것은 지식을 적절히 적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1:7은 말하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진화론 과학자들은 창조론을 반박하고, 지적 설계론은 비과학적이며 자연적 검증의 가치가 없다고 치부합니다. 소위 과학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관찰되어지고 실험할 수 있어야 하고, 꼭 자연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에 반해 창조론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것들은 관찰되거나 실험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창조론과 지적 설계론은 과학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데이터는 다른 사항에 대한 고려 없이 이미 인식된, 이미 가정된, 그리고 이미 받아들여진 진화론 안에서만 문제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근원과 생명의 근원은 모두 실험으로 입증되거나 관찰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모두 근원을 얘기할 때는 믿음을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로 모두가 실험으로 입증될 수 없는 이유는 우주와 생명의 근원을 관찰하기 위해 몇 억년 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화론 과학자들이 이론적인 측면에서 창조론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결국 진화론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최소한 근원을 밝히는 데 있어 창조론 보다 더 과학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진화론만 실험 가능한 것이기에 과학적이라 간주하여 유일한 근원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매한 일입니다. 왜냐면 대부분의 진화론 지지 과학자들은 다른 많은 근원설들에 대한 장점들을 검토하지 않고 무조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즉 ‘과학적’이라는 범주를 성립시키는 조건들이 부족하면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창조론이 사실이라면, 그 창조를 담당할 만한 창조자가 존재합니다. 진화론은 신이 없다 (무신론)고 강조하며, 생명이 창조자 하나님을 떠나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무신론자들에게 설명합니다. 진화론은 하나님은 우주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진화론은 무신론자들이 본 창조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우리의 선택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도 있고, 아니면 논리적으로 편협한 인간의 과학적 설명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과학과 서로 상반된 것인가?
질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과학과 서로 상반된 것인가?
대답: 과학은 “관찰, 정의, 설명, 실험적 조사, 그리고 현상의 이론적 설명” 등 이런 단어로 정의됩니다. 과학은 인류가 우주과학을 더 알고자 연구할 때 사용한 한 방법인데, 관찰과 추측을 기반으로 한 지식의 탐구입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전하였다는 것은 인간의 논리체계와 상상력이 그만큼 진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과학에 대하여 취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즉 무엇이 온전한 것이고 무엇이 불온전한 것임을 아는 이상 하나님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고, 과학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 믿음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을, 말씀 안에 지시된 믿음, 그리고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믿음을 둘 때, 완벽한, 전지전능한 창조주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과학을 믿는다는 것은 지적인 것입니다. 지식에 대한 믿음 그 이상의 믿음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놀라운 일들을 이루기 위해 과학을 의지하지만 또 많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과학을 의지한다는 것은 불온전한, 죄성의, 유한한 인간의 산물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과학은 많은 문제들을 통해 문제를 일으켜왔는데, 지구의 형태, 동력 비행, 백신, 수혈, 복제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답을 제시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과학이 밝혀 내는 사실을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기에 기독교인들이 과학의 이점들을 두려워하거나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주를 구축하신 방법에 대해 지식적으로 더 알아갈 때 인류는 하나님 창조의 경이로움을 감상하게 됩니다. 또 인간 지식의 확장은 질병, 무지 그리고 오해와 싸울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인간적 논리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더 높은 곳에 둘 때 위험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되면 과학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 믿음이 됩니다. 결국 이는 인간 자체를 믿기로 선택한 것이며 그 후 그 믿음을 방어하려 애쓰게 만듭니다.
가장 합리적인 과학자들 그리고 하나님을 믿기 거부하는 과학자들조차도 여전히 우주 이해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또 성경의 과학적 입증/반증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입증/반증할 수 없는 다른 많은 과학 이론들처럼 말입니다. 즉 과학은 어떤 특정한 입장을 내세우기 보다는, 오직 사실을 밝히는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사실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업적들을 결국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9:1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현대 과학자들이 우주에 대한 더 많은 신비를 알아낼 때마다 사실 하나님 창조에 대한 더 많은 증거들을 찾게 됩니다. DNA의 그 놀라운 복합적인 구조와 재생산, 복잡 난해하나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물리 역학, 그리고 이 땅의 많은 환경요소들과 화학적 요소간의 그 절대적인 조화들을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을 부인할 수 없게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진리를 밝혀내는 한 학문으로 수용하고, 과학을 하나님보다 더 높게 두어 신격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지구의 나이는 얼마일까? 얼마나 오래되었나?
질문: 지구의 나이는 얼마일까? 얼마나 오래되었나?
대답: 성경에 따르면 첫 사람인 아담은 지구 행성이 형성된 이후 여섯 번째 날에 창조되었는데, 이렇게 성경 기록에 근거한 인간의 연대사적 사건들을 통해 지구 나이를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물론 창세기 말씀을 인정할 때, 창세기에 묘사된 하루를 24시간으로 볼 때, 그리고 시간적인 오차가 없다고 가정하고 볼 때 나오는 결론이 되겠습니다.
창세기 5장과 11장에 열거된 족보는 아담과 그의 자손들의 나이를 나타내는데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계속해서 후손들이 번창합니다. 역사적 연대 가운데 아브라함이 어느 시기에 속하는지 우선 결정하고, 5장과 11장에 나타난 나이들을 더해보면 그리고 몇 백년의 오차를 감안하면, 지구의 나이는 대략 6,000년으로 추정됩니다.
그럼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지지하고 대부분의 교육 기관이 가르치는 지구나이 46억년은 어떻게 보면 될까요? 이 나이는 우선적으로 날짜를 셈하는 두 가지 기술 즉 라디오메트릭 셈과 지리학적 (Geologic timescale) 연대법이 그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 나이 6,000년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라디오메트릭 셈법의 가정 자체가 오류를 지니고, 지리학적 연대추정은 계속 순환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데 오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46억년 늙은 지구 나이설은 사실 신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지층, 화석, 다이아몬드, 석탄, 석유, 종유석, 석순 등이 형성되는데 무조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잘못된 관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모든 늙은 나이 지구설을 지지하는 증거들을 하나씩 반박하는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젊은 지구 나이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현재는 매우 소수이지만, 더 많은 과학자들이 현재 받아 들여지는 늙은 나이설 패러다임을 다시 연구하고 그 증거들을 재검토한다면, 젊은 지구 나이설을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궁극적으로 지구의 나이를 정확히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6,000년이든 혹은 46억년이든 혹은 그 중간이든 그를 지지하는 믿음과 가정에 따라 다르다 하겠습니다. 46억년으로 보는 사람들은 라디오메트릭 셈법에 신빙하고 그리고 이 방법에 영향을 끼치는 다른 어떤 역사적인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합니다. 또 6,000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신빙하고, 성경의 다른 사건들 예를 들면 대홍수나 이미 오래된 것 처럼 보이면서 창조된 천지가 명백한 지구의 나이를 암시한다고 봅니다. 즉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이미 다 장성한 성인의 몸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때 의사가 그들의 신체를 검사했다면, 그 의사는 그들의 나이를 20살 정도로 혹은 그들의 외모에 근거하여 결론지었을 겁니다. 사실 그들은 1살이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어떤 경우이든지 무신론자인 과학자들의 진화론적인 관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 더 나은 그 만한 이유들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적 설계론은 무엇인가?
질문: 지적 설계론은 무엇인가?
대답: 지적 설계론은 “복잡다양하고 정보가 넘치는 생태학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적인 것들이 있을 수 밖에 없고, 또 그것들은 경험적으로 탐지될 수 있다” 고 합니다. 즉 생태학의 어떤 특징들은 다윈의 “우연한 기회”설명에 도전장을 던지게 됩니다. 즉 생태를 우연한 발생의 결과가 아니라 설계되어 왔다고 봅니다. 설계는 원래 지적이고 총명한 디자이너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설계라는 말 자체가 어떤 한 설계자의 존재를 뒷받침합니다. 이 지적 설계론은 세 가지를 논점으로 삼는데, (1) 감소되지 않는 복잡성 (2) 특정화된 복잡성 (3) 인류학적 원리가 그것입니다.
1. 감소되지 않는 복잡성은 “…기초기능을 담당하는 한 시스템이 여러 요소들의 상호 작용이 잘 조화되어 돌아가며, 그 중의 어떤 한 요소를 삭감하는 것은 전체 기능을 마비시키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삶은 아주 많은 요소들이 서로 얽혀있고, 그것들이 잘 돌아가기 위해 상호 의존합니다. 어떤 돌연의 사고가 새 요소의 계발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어떤 한 기능적인 시스템에 필요한 다수의 요소들의 계발은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눈은 분명 매우 유용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안구 (그것 자체도 감소 불가능한 복잡한 시스템), 시신경, 그리고 눈 근육의 조직 없이, 임의로 돌연 발생한 것이라면 눈은 사실 생존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즉 한 쪽 눈이 양쪽 눈의 기능을 감당해내지 않는 이상 한 쪽의 눈만으로는 유능한 시스템을 감당해 낼 수 없습니다.
2. 특정화된 복잡성은 한 유기체는 복잡한데, 단순히 그저 복잡한 것이 아니라, 모두 특정한 것들이 한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잡한 구조가 단지 우연의 과정을 거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00마리의 원숭이와 100마리의 타자기로 꽉 찬 방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몇 마디의 말이나 한 문장의 말 뿐이지, 결코 세익스피어의 극본을 써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생태계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극본보다 얼마나 더 복잡합니까?
3. 인류학적 원리들은 세상과 우주는 생명이 지구에 살기에 적합하게 잘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상 공기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비율이 약간만이라고 변경되어도 많은 종자들은 벌써 멸종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몇 마일만 더 가깝거나 멀더라도 많은 생물들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지구상의 생명이 존재하고 발전하는 것을 보면 여러 요소들이 완전히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즉 그 많은 생태계의 요소들이 우연히, 설계되지 않은 채 일어나는 사건들이라고 보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지적 설계론은 지적으로 우주를 설계한 자가 하나님이건 혹은 우주인이건 누군가를 정의하는 것을 가정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지적 설계론자들은 유신론자들입니다. 그들은 생태계를 지탱하게 하는 설계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무신론자들은 설계론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지적 설계론의 데이터를 지구는 지구 밖 외계의 존재들(외계인)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로 설명합니다.
지적 설계론은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론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논점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에 있는 창조론은 신빙성이 있고,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지적인 존재)에 의해 설계되었다라는 결론으로 시작합니다. 그 후 이 결론을 지지할 증거들을 자연세계에서 찾아 냅니다. 반면에 지적 설계론은 자연 세계에서 시작하여 그 이하 주장들을 이끌어냅니다. 그래서 지구 상의 생명은 누구든지 간에, 막연한 어떤 지적인 존재에 의해서 고안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전지구적인가 아니면 지역적인가?
질문: 노아의 홍수는 전지구적인가 아니면 지역적인가?
대답: 성경구절을 잘 살펴보면 노아 때 홍수는 전 지구를 다 덮는 규모였습니다. 창세기 7:11을 보면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 칠 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합니다. 창세기 1:6-7과 2:6을 보면 대홍수 이전의 지구 상태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구절과 또 다른 성경 구절들 그리고 화석 기록과 현대의 지리적 발견들을 보면, 지구는 한 때 일종의 물 장막으로 덮여있었던 때가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이 장막은 수증기 막일수도 있고 혹은 토성환 같은 모양의 수증기 고리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가상되는데, 이 수증기막이나 고리가 여러 수분을 가진 대기층과 혼합되어 땅에 쏟아져 내렸을 때(창세기 2:6) 대홍수가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대홍수의 정도를 말하는 더 명확한 구절들은 창세기 7:19-23에 있습니다.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위 구절들에는 “모든” 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될 뿐 아니라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높은 산이 덮였고”,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였고” (방주가 떠서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등의 말들이 보입니다. 만약 이것이 전 지구를 덮는 규모의 홍수였다면 하나님께서 지구를 어떻게 이전 상태로 다시 회복하셨는지 상상이 잘 안됩니다만, 홍수가 지엽적인 규모였다면 하나님께서 왜 굳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저 동물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면 되는데 말입니다. 노아도 마찬가지로 피신하면 되구요. 그런데 노아에게 오늘날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각종 동물들을 담을 만한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거든요. 어떤 이는 공룡은 그 당시에 몸집이 작아지기 시작한 때라 노아는 완전히 자란 거대한 것들을 태울 필요는 없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또한 베드로후서 3:6-7에 이 노아 때의 대홍수를 언급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전지구적으로 다가올 심판을 노아시대의 대홍수와 비교하면서 이전에 존재했던 세계는 모두 물로 멸했다고 합니다. 또한 대홍수가 한 지역에만 속한 것이었다면 다시는 그런 대홍수를 보내시지 아니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8:21, 9:11, 15)은 몇 번이고 깨진 약속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노아의 세 아들(창세기 9:1, 19)의 후손으로 해석하고, 후의 많은 성경 저자들은 대홍수를 역사적 사실로 간주합니다 (이사야 54:9; 베드로전서 3:20; 베드로후서 2:5; 히브리서 11:7).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도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던 대홍수 사건을 믿었고, 그가 다시 오실 때 세상에 임할 멸망을 얘기할 때 이 대홍수 사건을 언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7-39; 누가복음 17:26, 27).
그 밖에 성경 외의 증거들도 많은데, 이제까지 세계적으로 닥쳤던 큰 재앙은 바로 다름아닌 전지구적 홍수라고 봅니다. 거의 모든 대륙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화석들의 집합체, 엄청난 양의 식물들이 가공할 만한 속도로 뒤덮여야만 생기는 석탄 침전들 그리고 그것들의 엄청난 양, 산 꼭대기에서 발견되는 해양성 화석들, 전 세계적으로 떠돌아다니는 270가지 이상의 홍수 이야기들 그리고 지리적으로 광대한 범위로 형성된 다층 침식들은 대홍수 사건을 신빙성 있게 만들고 있다 하겠습니다.
성경은 공룡을 기록하고 있는가?
질문: 성경은 공룡을 기록하고 있는가?
대답: 공룡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느냐는 주제는 기독인들이 지구의 나이, 창세기 해설, 그리고 우리 주위의 물증 해석 방법을 다룰 때 거론되는 한 사항입니다. 성경이 공룡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측은 공룡은 최초의 인간이 지구를 발로 밟기 몇 백만 년 전에 이미 죽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했던 사람은 살아있는 공룡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이 공룡을 언급했다고 주장하는 측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공룡이라는 단어 대신에 tanniyn (히브리어) 을 사용했고, 영어 성경은 이를 바다 괴물이나 뱀 그리고 대개 용으로 해석한 것으로 봅니다. Tanniyn은 거대한 파충류의 한 종류로 보여지며, 구약에서는 육지와 바다에서 나타나는 형태로 약 30차례 언급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서 거대한 파충류로 공룡을 묘사하는 것 이외에 몇 다른 용어를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Behemoth는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중에 가장 강력하다고 불려지는 데, 그 꼬리가 백향목과 같이 두껍다고 했습니다 (욥 40:15). 어떤 성경학자들은 Behemoth를 코끼리나 하마로 해석합니다만, 코끼리나 하마의 꼬리는 매우 얇아 백향목에 비유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브라키오소스와 디플로도쿠스 같은 공룡은 백향목과 같이 두꺼운 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고대 문명은 거대한 파충류를 새긴 조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미에서 발견되는 피트로글립스 조각이나 아주 작은 진흙으로 만든 조각들은 현대의 공룡조각과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다. 또 남미의 있는 한 바위 조각은 디플로도쿠스와 같은 형체의 공룡을 탄 사람을 새기고 있고, 또 놀랍게도 트리세라톱스류, 프테로닥틸류 그리고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류와 유사한 형태를 새긴 조각들도 있습니다. 또, 로마식 모자이크나 마야족의 자기류, 그리고 바빌로니아 도시 성벽들을 보면 인간의 공룡에 대한 흥미는 문화와 지역을 초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마르코 폴로의 한 소설 (Il Millone)을 보면 보물을 소유한 짐승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현대의 관점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그대로 믿기에 매우 어렵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 밖에 공룡과 사람이 공존했음을 보이는 충분한 인류학적, 역사적 증거 외에 또 다른 물증이 발견되었는데, 북미와 중서부 아시아 지역에서 인간과 공룡의 발자국이 같이 찍혀 있는 화석이 그것입니다.
그럼 성경은 공룡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한 가지의 답을 제시하기에는 어렵고, 각각의 증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성경이 문자로 설명했다면 그 결과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또한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다는 사실도 인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다면 공룡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성경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적 변화의 문제라던지 사람에게 사냥을 당했을 거라고 추측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 나무를 에덴 동산에 두셨을까?
질문: 왜 하나님은 선악과 나무를 에덴 동산에 두셨을까?
대답: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선택권을 주시기 위해서 에덴 동산에 선악과 나무를 두셨습니다. 사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 제외하고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었습니다. 창세기 2:16-17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이브는 몸에 프로그램 되어있는 데로 움직이는 로보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자유 의지”를 가진, 결정 능력이 있는 그리고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들은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선악과 나무 자체가 근본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선악과 과실을 먹는다고 아담과 이브가 정말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선악과 과실의 요점은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자체가 그들을 악에 눈 뜨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세상과 그들의 삶 가운데 죄와 악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 과실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항한 불순종의 행동으로서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6-7절에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범죄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범죄할 것을,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죄악과 고통과 죽음이 이 세상에 침투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고, 사탄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로보트가 아니라 선택권을 갖은 존재로 만드시고자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를 부추기는 사탄의 행동도 허락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불순종하기로 선택하고 그래서 금지된 과실을 먹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세상은 죄악과 죄와 고통과 질병과 그리고 죽음으로 물들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결정은 모든 사람이 죄성 즉 죄를 짓고자 하는 경향을 갖고 태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결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보혈을 흘리셔야만 되도록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의 결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결국 죄 자체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로마서 7:24-25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을 되뇌이기를 기도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가인의 아내는 누구였을까? 가인의 여자 형제 중 하나였을까?
질문: 가인의 아내는 누구였을까? 그의 여자 형제였을까?
대답: 가인의 아내가 누구였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가인의 여동생 혹은 조카 혹은 조카딸이라고 밖에 답할 수 없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가인의 나이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4:8). 그들 모두 농부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들은 자신의 가정을 가진 장성한 성인으로 보여집니다. 아벨이 죽었던 그 시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자녀는 가인과 아벨외에도 많았습니다. 후에도 더 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5:4). 특히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낀 것으로 볼 때 (창세기 4:14) 많은 숫자의 자손들 즉 아마도 아담과 하와의 손자소녀, 혹은 증손자 증손녀의 존재를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가인의 아내 (창세기 4:17)는 아담과 하와의 딸이나 손녀 중 하나로 볼 수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는 그들끼리 서로 혼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근친결혼은 사람들의 숫자가 충분히 늘어나 근친결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레위기 18:6-18).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유전자적 이상이 잘 일어납니다. 이는 동질의 유전자를 가진 두 사람이 (한 가족 내의 형제 자매) 같은 유전자적 결함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혈연의 두 사람은 같은 유전자적 결함을 가지기 힘듭니다. 인간의 유전자 코드는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 유전자 결함이 배가되고, 강화되고, 세대간에 계속 이어지면서 점진적으로 오염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어떤 유전자 결함도 지니지 않았기에 그들의 후손 처음 몇 세대는 현대의 우리보다 훨씬 나은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유전자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거의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간의 근친결혼은 안전했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