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성경 관련 질문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사도는 누구인가?



질문: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사도는 누구인가?

대답:
‘제자’는 ‘배우는 자’ 혹은 ‘따르는 자’ 그리고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열 두 명이 제자라고 불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열 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웠고, 그에게 훈련을 받았고, 부활과 승천 후에 열두 제자는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그 때에도 제자와 사도라는 용어는 서로 겹쳐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훈련시키신 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열두 제자/ 사도들은 마태복음 10:2-4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열두 제자/사도들의 이름을 마가복음 3:16-19과 누가복음 6:13-16에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 구절들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조금 있습니다. 다대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 (눅 6:16)와 “레배” (마태복음 10:3)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시몬은 가나안인 시몬으로도 불립니다 (막 3:18). 가롯 유다는 예수는 배반한 자로 맛디아가 그를 대신했습니다 (사도행전 1:20-26). 어떤 성경 학자는 맛디아를 열 두 사도 가운데 부적합한 자로 보고, 사도 바울을 가롯 유다를 대신하기 위해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로 봅니다.

열 두 제자/사도는 하나님께서 비범하게 사용하신 평범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 열 두명 가운데는 어부, 세리, 혁명가 등이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이 열 두 제자들의 끊임없는 실패, 좌절, 그리고 의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과 하늘로의 승천 후에는, 성령께서 그 열두 제자/ 사도들을 변화시키셔서 하늘과 땅을 진동할 만한 아주 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6).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했습니까? 열두 사도/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사도행전 4:13).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길 고대해봅니다!

절대적 진리/ 보편적 진리는 있는가?



질문: 절대적 진리/ 보편적 진리는 있는가?

대답:
절대적 진리/보편적 진리와 같은 것들이 실제로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가 무엇인지 정의해 보도록 해야 합니다. 진리는 사전에 의하면, “입증된 사실, 명제; 현실, 사실, 실상, 실태” 등으로 정의 됩니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실존하는 현실은 없고, 존재하는 것은 그저 사람의 관념과 의견 뿐이라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절대적인 사실은 분명히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적 진리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완전히 상반된 이분적 견해를 보게 됩니다.

하나는 현실을 정의하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을 가진 자들은 모든 것이 상재적이며 그러므로 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어떤 한 행동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할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상황적 윤리’”과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옳고 그름이 없으므로, 자신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느끼던지 그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적 윤리”는 “무엇이든지 좋게 느끼는 대로”의 정신과 인생철학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타인과 사회에 파괴적인 영향을 가져오게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옳고 그름을 정의할 수 있는 절대적인 현실과 기준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기준을 적용함에 따라 한 행동은 옳던지 그르던지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절대적인 것들이 없고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럽게 될 지 말입니다. 예를 들어 중력의 법칙을 보세요. 만약 그 법칙이 절대적이지 않다면,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수 마일 떨어진 하늘에 가 있을 것이고, 어쩔 때는 몸을 움직이지 조차 못할 것입니다. 이런 법칙 말고라도, 숫자만 생각해 봅시다. 숫자가 더 이상 절대적 가치를 지니지 않게 된다면 어떤 혼란이 야기될지 말입니다. 예를 들어 둘 더하기 둘은 더 이상 넷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아마 큰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더 이상 과학의 법칙, 물리학 법칙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평가의 기준은 없어지고,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혼란스럽게 될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고, 그 진리는 발견되고 또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의 그 생각은 아주 비논리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 상대주의를 지지하고, 상대주의의 중심은 어떤 모양의 절대적 진리도 거부합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질문은 “절대적으로 확신합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절대적 명제가 절대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 되어 논리적으로 오류가 됩니다. 즉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자체가 유일한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진리/보편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몇 가지 논리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자기 모순입니다. 즉 위에서 언급했던 질문과 같이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절대적인 것을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철학은 자기 파괴와 자기 모순적입니다. 절대적인 것들은 없다는 명제는 그 자체가 모순적인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는 두 번째 문제점은 모든 인간은 제한된 지식을 가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제한되고 유한한 생각 밖에 하지 못하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절대적인 부정 명제를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논리적으로 한 사람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모든 우주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들을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모두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나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할 때 (사실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명제), 가장 합리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말하려면, “내가 가진 유한한 지식으로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거나 “내가 가진 유한한 지식으로서 나는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각자의 양심, 각자의 경험 그리고 각자가 처한 현실 가운데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지켜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면,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에게는 옳은 것’이 ‘나에게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상대주의는 처음에는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하지만, 결론은 엄청나게 파괴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이 상재적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각자에게 맞는 자신의 규칙을 세우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행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옳다고 생각해서 한 것이 다른 사람과의 마찰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 신호를 지키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빨간 불이 켜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의 결정이 다른 사람을 위험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혹은 나는 너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은 살인하는 것이 옳다 생각하고 그러므로 보는 데로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면, 절대적인 진리와 모든 것들은 다 상대적인 진리일 뿐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죽이지 않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 됩니다. 훔치는 것이나 훔치지 않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잔인함과 잔인하지 않는 것도 동일합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들을 가지고 옵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면 아무도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혹은 “너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면 심지어 정부 조차도 사회에 규칙을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들이 보입니까? 각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행하는 것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절대적 진리가 없다면,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이 없다면 모든 사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또한 그것들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살인, 강간, 도적, 거짓말, 속임 등을 행하고 그리고 아무도 그것이 틀리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 법, 정의는 필요없게 됩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없는 세상은 아마 상상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에게는 옳을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아”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한 개인이 선호하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한 사람 안에 갇히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삶의 의미는 찾을 수 없고, 영생에 대한 소망은 부질없는 것이 됩니다. 이런 상대주의의 결과는 종교에 있어서도 혼란을 가져 옵니다. 하나의 절대적인 종교는 있을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도 단 하나가 아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함께 다 거짓이 됩니다. 왜냐면 모든 종교는 영생과 절대적 진리를 어느 모양으로나 주장하고 가르치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사람들은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 서로 완전히 대립되는 진리를 가르치는 종교가 결국에는 똑같이 옳다고 주장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은 모든 종교는 다 동일한 것이고 모두 천국으로 이끈다는 만인 구제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예수님만이 궁극적인 진리가 되시고,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 성경(요한복음 14:6)을 믿는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그토록 비난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이다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고 보는 관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서구에서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마저 많은 사람들이 거부해 왔습니다.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불리는데,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가치, 믿음, 생활 양식, 그리고 진리는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욕하고 비판합니다.

사실, 관용은 이 시대의 가장 으뜸가는 덕목이자 절대적인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덕목에 대립하는 비관용은 상대적으로 악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한 가지만을, 특히 절대적 진리를 독단적으로 믿는 종교나 한 개인은 관용적이지 않게 되어 유죄로 낙인 찍힙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옳은 것은 상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를 믿는 자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주 말합니다. 네가 믿는 것들을 남에게 강요하지만 않는 이상, 얼마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믿는 것은 옳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미 평가한 것이며, 그 말 자체를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자체 모순이 됩니다. 즉 상대적인 가치가 세워 놓은 기준을 남에게 강요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주장하는 상대적인 가치 자체는 더 이상 상대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던지고 싶은 질문은 그토록 관용을 주장하는 자들이 어찌하여 절대적인 진리를 믿는 자들에게 그렇게 관용하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치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며 그리고 사회를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가치 체계를 왜 그토록 붙들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가장 간단한 이유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한 행동에 책임 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은 그 기준에 따라 각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진정한 속마음입니다.

절대적 진리/ 보편적 진리에 대한 거부와 문화적 상대주의는 진화론을 삶을 해석하는 한 방편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만들어낸 논리 산물입니다.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삶의 목적도 있을 수 없고, 고로 절대적인 옳고 그름도 없게 됩니다. 그럼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아무도 그가 행한 일에 대해 책임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그리고 그의 절대적인 진리를 얼만큼 거부하고 싶던지 간에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로마서 1:18-22).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증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열심히 고민하다 보면 절대적 진리는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즉 우리의 양심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옳다 저것은 그르다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고통, 배고픔, 강간, 아픔, 악과 같이 옳지 않은 것이 있음을 스스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사랑, 관대, 긍휼, 평화 등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긍정적인 것들 임도 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2:14-16에 보면 인간의 양심에 대해 말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는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절대적 진리에 대한 두 번째 증거는 과학에서 보여집니다. 과학은 간단히 지식에 대한 추구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더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과학적인 연구는 세상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현실들이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발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들이 없이 과학적인 연구는 무엇을 가지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발견한 것들이 실제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실 과학적 법칙이야말로 절대적인 진리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증거는 종교의 존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와 의미를 주고자 시도합니다. 종교는 인간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배후에는 근본적으로 이 육체적인 존재를 초월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종교를 통해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과 소망, 그리고 죄에 대한 용서, 분쟁을 해결하는 평화, 모든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자체는 인간은 단순히 진화된 고차원의 동물 그 이상이라는 것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보다 더 높은 목적, 그리고 게다가 인격적이고 목적을 가진 창조주가 자신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사람의 마음에 심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창조주가 존재한다면 그야말로 절대적 진리의 기준이 되며, 창조주의 권위가 그 진리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런 창조주가 계시고 그리고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 그의 진리를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보편적 진리를 알고 싶다면, 그를 위한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로 유일한 ‘진리’가 되었다고 부르짖으신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셔서,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알도록 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외계인이나 미확인 비행 물체 같은 것들이 실제로 있는가?



질문: 외계인이나 미확인 비행 물체 같은 것들이 실제로 있는가?

대답:
외계인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고, 지능, 감정 그리고 의지를 가진 어떤 존재를 가정해 봅시다. 첫째, 몇 가지 과학적인 사실은:

1. 사람들은 태양계에서 명왕성을 제외한 모든 행성에 우주선을 보냈다. 화성을 제외한 모든 행성들을 파악했는데, 화성과 목성은 생명이 살 수 있는 곳으로 판정되었다.

2. 1976년에 미국은 두 명의 우주 상륙자를 보냈다. 두 명 모두 화성의 모래를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공구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생명체의 흔적이 있는지 그 땅을 분석했다. 그러나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가장 불모의 메마른 땅을 파고, 남극대륙에 있는 가장 얼어붙은 토양을 파서 토양들을 분석했다면, 사실 한 무리의 미생물은 모아야 되는 것이다. 1997년에 미국은 화성의 표면에 탐험대를 보냈다. 화성에서는 더 많은 샘플들을 취했고 더 많은 실험을 행했다. 그러나 역시 어떤 생명체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몇 차례의 비행을 화성으로 착수했다. 그러나 똑 같은 결과만을 가져왔다.

3. 천문학자들은 계속적으로 태양계에서 멀리 있는 새로운 행성들을 발견한다. 어떤 자들은 이렇게 많은 행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히 우주 어디엔가는 생명체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중 어떤 행성에서도 생명체를 지탱할 만한 행성은 발견된 것이 없다. 사실 지구와 이들 행성들간의 측량할 수 없는 먼 거리는 생존 가능성에 관한 판단을 내리기에 불가능하게 한다. 오직 지구만이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생명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진화론자들은 태양계에 있는 다른 행성들을 찾아내서 그곳에서 생명체가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려고 혈안이다. 아마 태양계 어딘가에 그런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행성들이 억지로라도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곳이지 검증하기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지구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의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그가 태양, 달, 별들을 창조하시기 전에 지구를 먼저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7:24절, 26절은 말하길,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의 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창조 후 인간은 죄가 없었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보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창세기 1:31). 그러나 첫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창세기 3장), 인류는 타락했고, 그것은 갖가지 종류의 문제들, 질병, 그리고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동물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은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도 동일하게 고통하고 죽습니다 (로마서 8:19-2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할 처벌을 제거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 아담 이후로 존재했던 갖은 저주들을 제거하시고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리실 것입니다 (계시록 21장-22장). 로마서 8:19-22를 보면 모든 창조물들이 이 시간을 염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는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인간들을 위해서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단 한번의 죽음으로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27; 9:26-28; 10:10).

이들이 내포하는 의미: 모든 창조물들이 고통 받는다는 것은 지구 이외에 다른 행성에 있는 어떤 생명체라도 또한 고통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쟁 자체를 위해서 다른 행성에 도덕적인 존재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들도 또한 고통 받으며, 최소한 지금은 고통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모든 것이 큰 소음 가운데 사라지는 그 날 그리고 모든 것들이 큰 불 가운데 녹아 내리는 그 날, 분명히 고통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10). 그 다른 행성에 있는 도덕적인 존재들이 죄를 지은 적이 없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시는 것은 정당하지 않지만, 그들이 죄를 지었다면 그리스도는 오직 단 한 번만 죽으실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아직까지 그들의 죄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아직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9). 결국 다른 행성에 도덕적이 생명체가 없지 않는 이상 외계인의 존재 자체는 아주 난해한 역설, 궤변을 이끌어 낸다.

그럼 다른 행성에 있는 생명체들이 비도덕적이고 감각이 없는 존재라 가정한다면? 그러니까 조류 혹은 개나 고양이가 이름 없는 행성에 산다고 가정한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경과 특별히 관련된 무엇은 없겠지만, 이런 질문이 남아있다. 모든 창조물이 고통 받는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비도덕적이고 감각이 없는 것들을 다른 멀리 있는 행성 가운데 두시고는 그들이 고통 받도록 하실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우주의 다른 곳에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믿도록 어떤 근거를 주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왜 근거를 줄 수 없는지 몇 가지 답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이상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외계인이나 미확인 물체를 지지할 근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어떤 근거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영적이겠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마귀적인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성경은 각 사도들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가?



질문: 사도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성경은 각 사도들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가?

대답:
성경은 사도 중 야고보에 대한 죽음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2). 헤롯 왕이 야고보를 칼로 죽게 했다고 했는데, 아마 머리를 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사도들의 죽음은 오래된 교회 관련 기록들 밖에 의지할 수 없으므로, 이런 자료에서 벗어난 다른 이야기들의 신빙성은 좀 떨어집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은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X모형이 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8). 다음은 가장 잘 알려진 다른 사도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했고, 요한은 로마 대박해 기간 동안에 끓는 기름 솥에서 순교를 맞이하다, 결국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합니다. 그 때 요한은 밧모섬에 있는 감옥에서 광석 캐는 일을 하도록 처벌받는데, 그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씁니다. 사도요한은 후에 석방되어 현재의 터기로 후송됩니다. 그는 늙어서 죽었는데, 평화롭게 죽은 유일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 (공식적으로 사도는 아니지만)는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로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지 않았는데, 그 때 템플 (Temple) 지역의 동남쪽에 있는 100피트 높이의 탑에서 떨어뜨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야고보를 밀친 사람들이 야고보가 떨어진 후에도 생명이 붙어 있음을 보고, 채찍으로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 탑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실 때 데리고 올라갔던 그 탑이라고 합니다.

나다니엘이라고도 불리는 바돌로매는 소아시아로 간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터기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다 아르메니아에서 간증하던 중 채찍에 맞아 순교하였슶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X자 형의 십자가에서 순교하였는데, 일곱 명의 군사가 살이 벗겨지도록 심하게 채찍질을 한 후, 고통을 더 길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묶어 두었다고 합니다. 안드레를 따랐던 자들이 고백하기를, 그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이런 말로 죽음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 행복한 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십자가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신성하게 된 것이다.” 안드레는 죽는 날까지 2틀 동안 십자가에서 그를 고문했던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사도 도마는 인도에서 교회를 세우고 다니는 선교 여행 중 그곳에서 창에 찔려 죽었다고 합니다. 가롯 유다를 대신해서 선택된 사도 맛디아는 돌에 맞은 후 참수 당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문을 당하고 결국 67년도에 로마 네로 황제에게 참수당했다 합니다. 다른 사도들에 대한 전해지는 말들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사도들 모두가 그들의 믿음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도 부활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거짓을 위해 기꺼이 죽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그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면서까지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가장 진실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꿈 해석? 그리스도인들의 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질문: 그리스도인들의 꿈 해석? 그리스도인들의 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대답:
GotQuestions.org 싸이트에서는 꿈 해석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즉 꿈을 해석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꾼 꿈과 그 꿈에 대한 의미는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해석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여전히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수 차례 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면, 야곱의 아들 요셉 (창세기 37:5-10),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 (마태복음 27:19)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언자 요엘의 예언 (요엘 2:28) 즉 사도행전 2:17에 사도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꿈을 사용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꿈으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좀 차이가 있습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성경은 하나님 말씀의 완성품으로서 지금 현재로부터 영원 때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다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다 혹은 꿈을 통해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이 인류를 다루실 길들을 이미 모두 보이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것이 꿈이던, 비전이던, 아주 작은 음성이건 모두 하나님께서 이미 계시하신 말씀과 완전히 부합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꿈이 성경의 권위보다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느껴진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연구하고, 그 꿈이 성경과 부합하는지 잘 기도해 보시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꿈에 대응하여 당신이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지 잘 고려해보세요 (야고보서 1:5). 성경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꿈을 꾼 사람은 누구던지 간에, 하나님께서 항상 그 꿈의 뜻을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직접 보이시던지 아니면 천사를 통해서든 혹은 메신저를 통해서든 보이셨습니다 (창세기 40:5-11; 다니엘 2:45; 4:1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항상 그 말씀하신 뜻을 분명히 이해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왜 그의 선택된 백성들로 선택하셨을까?



질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왜 그의 선택된 백성들로 선택하셨을까?

대답:
이스라엘 국가를 말하자면, 신명기 7:7-9에서 말하길,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 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자 (요한복음 3:16)를 통해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죄로 인한 타락 후에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하나님은 그 후에 메시야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후손에서 나올 것이라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12: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백성들이 되도록 하신 궁극적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선택 받은 민족’이 필요 없었지만, 그렇게 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어느 민족을 통해서든지 오셔야만 했는데, 그를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단지 메시야를 탄생케 하기 위한 것 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바라셨던 것은 다른 사람들에 가서 하나님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예언자 그리고 선교사들의 나라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별된 나라가 되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목적은 열방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이신 구원자, 메시야, 그리고 구원자를 향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스라엘은 이 업무를 수행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즉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애완동물이나 동물도 천국에 가는가? 애완동물이나 동물도 영혼이 있는가?



질문: 애완동물이나 동물도 천국에 가는가? 애완동물이나 동물도 영혼이 있는가?

대답:
성경에 애완동물이나 동물도 영혼이 있는지 또는 천국에 가는지 특별히 알리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성경에 나타난 원리들을 가지고 이 주제들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고 (창세기 2:7), 동물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창세기 1:30; 6:17; 7:15, 22). 주요 차이점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창세기 1:26-27), 동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다는 뜻은 하나님과 같이 마음, 감정, 의지를 가진 영적인 존재 그리고 죽음 후에도 계속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완동물이나 동물이 영혼이나 불멸의 면모를 지녔다 하더라도 사람의 그것과는 달리 하등한 질이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죽음 후에 영혼을 지니지 않습니다.

또 생각해 봐야 할 사항은 하나님은 동물을 창세기에서 그의 대창조 과정의 한 부분으로 창조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동물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노라 하셨습니다 (창세기 1:25). 그러므로 새 땅에 동물들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적당한 이유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1). 천년왕국 기간 동안 동물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이사야 11:6; 65:25). 이들 중에 내가 가진 애완동물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우리가 천국에 갈 때 이 문제에 대한 그분의 결정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왜 유대인과 아랍인/이슬람교도는 서로 미워하는가?



질문: 왜 유대인과 아랍인/이슬람교도는 서로 미워하는가?

대답: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첫째, 모든 아랍인들은 이슬람 교도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이슬람 교도도 아랍인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다수의 아랍인들은 이슬람교이지만, 이슬람을 신봉하지 않는 아랍인들도 있고, 또한 이슬람교도 중 다른 국적을 가진 자들이 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등지의 무슬림). 둘째, 모든 아랍인들이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또 모든 무슬림이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유대인이 아랍인과 이슬람교도들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아랍인과 이슬람교도들은 유대인들을 혐오하고 불신하며,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적개심과 증오를 설명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아브라함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자손이고, 아랍인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들입니다. 이스마엘은 여종의 아들로서 (창세기 16:1-16) 그리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어 받을 약속된 아들로서 (창세기 21:1-3),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명백한 적대감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업신여긴 후 (창세기 21:9),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멀리 보내라고 합니다 (창 21:11-21). 이와 같이 이 사건은 이스마엘의 마음에 더욱 큰 모욕감을 가져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천사는 하갈에게 이스마엘은 모든 형제와 불화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16:11-12).

다수의 아랍인들을 신봉자로 가진 이슬람 종교는 이 적대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코란은 유대인이 가르치는 것과 상반된 것들을 가르칩니다. 무슬림은 유대인을 형제로 대해야 한다고 하는 반면, 또 다른 때에는 무슬림은 이슬람교도로 변절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공격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코란은 또한 아브라함의 약속된 아들이 누구였느냐에 대해 혼란을 일으킵니다. 히브리 성경은 분명 이삭이라고 말합니다. 코란은 이스마엘이었다고 합니다. 코란은 아브라함이 주께 바친 자식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창세기 22장과 모순됨) 누가 약속된 아들이었느냐에 대한 이 논쟁은 오늘날에 있는 둘 사이의 적대감에 한 몫 더했습니다.

그러나 적대감의 뿌리인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의 쓰라림은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적대감의 모든 원인이 아닙니다. 사실, 중동 역사를 보면 몇 천년 동안 유대인과 아랍인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적대감의 주된 원인은 근대에 일어난 일에 근거를 두는데, 제 2차 세계 대전 후에, UN이 이스라엘의 땅의 한 부분을 유대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땅은 당시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이스라엘 국가가 그 땅에 설립되는 것에 대해 아주 거칠게 반항했습니다. 아랍권 국가들은 연합하여 그 땅에서 이스라엘을 쫓아내려고 이스라엘에 공격을 가했으나 이스라엘에게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국가들 사이에는 커다란 적대감이 형성되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은 아주 작은 땅을 소유하고 있고, 큰 아랍 국가들 예를 들면, 요르단, 시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그리고 이집트들이 그 주변에 두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국가로서 자신의 땅을 소유할 권리가 있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후예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은 평화를 추구하고 아랍 주변국가들에게 존경심을 표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122:6절은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법을 순종해야 하는가?



질문: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법을 순종해야 하는가?

대답:
로마서 13:1-7에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임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정부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부와 다스리는 자를 세우신 것은 질서를 세우고, 악을 징벌하고, 정의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창세기 9:6; 고전 14:33; 로마서 12:8). 우리는 정부가 요구하는 모든 사항 예를 들면 세금을 내고, 규칙과 법을 준수하고, 존엄성 등에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 정부를 우리 위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3:1-7을 썼을 때, 그는 로마 정부 아래 그러니까 네로 황제의 정권 아래 있었습니다. 아마 로마 황제들 중 가장 극악한 자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당시 자신을 다스리는 정부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럼 정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 때는 언제입니까? 그 해답은 아마 사도행전 5:27-29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땅에서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모순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땅의 법을 따라야 하고, 모순되는 법은 거부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정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채찍질에 대해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에 기뻐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5:40-42).

심령술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은 무엇인가?



질문: 심령술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은 무엇인가?

대답:
성경은 아주 강력하게 심령주의, 무당술, 마술, 심령술들은 비난합니다 (레위기 20:27; 신명기 18:10-13). 별자리 운세, 카드 점술, 점성술, 운세, 손금 보기, 교령술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잡신, 영, 죽은 자(내가 사랑했던 자들 가운데) 들이 나를 도와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행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잡신이나 영들은 모두 귀신, 마귀입니다 (고린도후서 11:14-15). 성경은 죽은 자들이 우리와 연락할 수 있고, 혹은 접촉하기 원한다고 결코 말한 적이 없습니다. 죽은 자들이 만약 믿는 신자였다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곳인 천국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을 것이고, 그들이 믿지 않고 죽었다면 그들은 지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반역한 결과 지옥에서 끝나지 않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연락할 수 없다면, 어떻게 무당, 심령학자들이 사람들에 대한 일부 정보들을 알아 낼 수 있느냐 말입니다. 심령사들은 일반적인 방법들을 통해서도 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단순히 전화기에 나타나는 발신자 전화 번호를 가지고서도 인터넷에서 그 사람에 관한 이름, 주소, 생년월일, 결혼 날짜, 가족 수등을 얻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술사들은 이런 정보 이외에 전혀 알아내기 불가능한 사항들을 알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아내는가? 답은 사탄과 귀신들로부터 듣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14-15는 말하기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사도행전 16:16:18을 보면 미래를 알려주는 한 점치는 자가 나오는데, 사도 바울이 그 사람의 안에 있는 귀신이 나오라고 명할 때까지 계속 미래를 점치며 따라다녔습니다.

사탄은 자신이 친절하고 도울 수 있는 자처럼 자신을 가장합니다. 뭔가 그럴 듯 하게 좋은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사탄과 그를 따르는 귀신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일들을 심령사 들에게 알려주고는 그 사람이 심령주의에 빠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금하고 계신 일입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시작했다가는 심령술에 빠지게 되어서는 결국에는 사탄에게 조정 당하고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파괴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5:8을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심령술사들은 어떤 한 사람에 대해 자신이 알게 된 내용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고, 스스로 잘 속기 쉽습니다. 어떤 경우이던지, 어디서 온 것이던지, 우리가 심령주의, 마술, 점성술 등에 연결되어 앞으로의 일들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뜻을 알기 원하시는가? 첫째, 성경을 공부한다 (디모데후서 3:16-17), 두번째, 지혜를 구한다 (야고보서 1:5).

성경은 노예 제도를 묵과하는가?



질문: 성경은 노예 제도를 묵과하는가?

대답:
노예 제도는 오랜 옛날에나 있었던 얘기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세계에는 약 1,200만의 사람이 강제 노역, 성 노리개, 상속 가능한 소유물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죄의 노예에서 풀려난 자들로서 오늘날 세상에 있는 인간의 노예 제도의 역사를 종결시키는 데 앞장서는 자가 되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있는 질문은 왜 성경은 노예 제도를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입니다. 게다가 왜 성경은 노예 제도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성경은 노예 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것 같이 보입니다. 성경은 노예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으며 (신명기 15:12-15; 에베소서 6:9; 골로새서 4:1), 노예제도를 법으로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구절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모든 종류의 노예제도를 묵인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이 있는데,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노예제도와 몇 세기 전의 여러 나라에서 행해진 노예제도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이는 노에는 인종에 따라 행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사람의 국적이나 피부색으로 인해 노예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성경이 쓰여진 그 당시에는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즉 당시 사람들은 빚을 갚거나 자신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떄로는 의사, 변호사 그리고 정치가들도 자신을 노예로 팔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노예의 주인이 공급으로 자신의 모든 필요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몇 세기 동안 행해졌던 노예제도는 피부색에 한정되어 이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많은 흑인들은 그들의 국적으로 인해 노예로 취급되었고; 많은 노예 소유주들은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믿었습니다. 인종 차별에 근거한 노예 제도를 성경은 강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경험했던 노예 생활을 보세요.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노예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3:14). 애굽에 내려졌던 하나님의 재앙은 이런 인종 차별적인 노예를 하나님이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를 나타냅니다 (출애굽기 7장 -11장). 그러므로 성경은 노예 제도를 분명히 비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허락했던 노예제도는 우리가 지난 세기 보아왔던 인종적인 노예제도는 절대 아닙니다.

더욱이, 구약과 신약 모두 19세기 아프리카에서 행해진 ‘노예 매매’ 의 실행에 대하여 비난합니다. 아프리카인들이 노예 사냥꾼에 의해 한 곳에 모여지고, 노예 거래인들에게 팔렸으며, 대규모 농원이나 목장에 일하기 위해 신세계에 끌려갔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의 벌은 죽음입니다.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비슷하게 신약에서 노예 매매는 “불신앙적이고, 죄악’으로 간주되었고, 그 부모를 죽이거나, 살인자, 음행자, 남색자,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디모데 전서 1:8-10).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성경의 목적은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지 사회를 개혁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성경은 종종 안에서 밖으로의 관점을 취해서 문제를 접근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 긍휼, 은혜를 경험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도 고치셔서 그가 생각과 행동도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과 죄에서 해방된 자유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도 치유하심에 따라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경험한 자라면 다른 이들에게 은혜로 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노예 제도가 해결되기 원하는 것이 성경의 방침입니다.

십계명은 무엇인가?



질문: 십계명은 무엇인가?

대답:
십계명은 성경에 있는 열 개의 율법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후 얼마 안 되어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근본적으로 구약 율법에 있는 600개 이상의 계명을 요약한 것입니다. 처음 4 개의 명령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의 6개의 명령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성경의 출애굽기 20:1-17와 신명기 5:6-21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래와 같습니다.

1.“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는 유일하신 참 신이신 하나님 이외에 어떤 다른 신들을 예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다른 신들도 모두 거짓 신입니다.

2.“너를 위하여 시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 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계명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잘 묘사할 수 있는 형상을 인간이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불리는 우상을 만드는 것은 거짓된 신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3.“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경외하고 존귀한 방법으로 그 분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4.“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 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는 안식일(토요일, 한 주간에 마지막 날)을 쉼을 갖는 날로 주님께 받치라는 것입니다.

5.“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는 부모님을 항상 존중하고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6.“살인하지 말지니라.” 이는 다른 사람들 죽일 계략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7.“간음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

8.“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남의 것 즉 내게 속하지 않은 것을 그 사람의 허락없이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9.“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이는 다른 사람에 대해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거짓말에 대한 경고입니다.

10.“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내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나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탐심은 위에 나열된 계명 즉 살인, 간음, 도적질 등을 범하도록 이끕니다.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이 나쁘다면, 그 일을 바라는 것 조차 그릇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계명을 죽음 이후에 천국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는 법으로 잘못 보고 있습니다. 이와 다르게 십계명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완벽하게 법을 따를 수 없다(로마서 7:7-11) 는 것을 깨닫게 만들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필요로 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19:6 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완벽하게 십계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전도서 7:20). 십계명은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로마서 3:2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가능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현대에도 환상을 보이시는가? 환상은 기독교 신자들 경험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하는가?



질문: 하나님은 현대에도 환상을 보이시는가? 환상은 기독교 신자들 경험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하는가?

대답: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환상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이 21세기에도 비전을 주십니까? 가능하겠죠. 그럼 환상은 일반적인 현상으로 봐야 합니까? 그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듯이,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여러 번 사람들과 대화하십니다. 예를 들면, 야곱의 아들 요셉, 마리아의 남편 요셉, 솔로몬,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베드로, 바울 등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선지자 요엘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보도록 하실 것이라 했는데,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장에서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환상(비전)과 꿈의 차이점입니다. 환상은 사람이 깨어있을 때 보는 것이고, 꿈은 잠들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많은 환상과 꿈으로 의사소통 하시는 지역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복음이 거의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초대 교회 시절 때 (사도행전 참조) 하나님이 진리를 계시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던 방법으로 성경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한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시기 위해서 어떤 수단이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선교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천사, 환상, 꿈 등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또한 복음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도 환상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환상을 얘기할 때 그리고 그것을 해석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즉 성경의 기록은 이미 완성작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진실된 환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서 나타내신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환상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거나 동등한 권위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최종적인 권위를 지닙니다. 만약 당신이 보았던 환상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검토하여 당신이 보았던 비전이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환상을 통하여 당신이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지 기도해보세요 (야고보서 1:5). 하나님은 환상을 주시고는 그 뜻을 감추시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환상을 본 자가 하나님께 그 뜻을 물을 때, 하나님은 그 환상의 뜻이 잘 설명되어졌는지 확인하셨습니다 (다니엘 8:15-17).